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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 때문에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결혼이었다. 이후 잉글랜드와의 [[외교]]관계가 급격히 악화. * 1559년, 그 유명한 '[[금서]] 목록'을 선포해 사상적 탄압 개시.[* 다만 이 점은 당시 체계적인 검열 시스템의 부재, 금서 목록을 총괄하는 [[이단]]심문국의 관료제적 허술함, 그리고 검열의 실질적인 비집행으로 인하여 서류상에만 남아 있는 법이 되었다. 당장 이단심문국의 검열은 스페인 내부의 인쇄소에만 손을 댈 수 있으니, 금서 목록에 등록 된 책이 필요하면 바다 건너 이탈리아나 [[플란데런(역사적 지명)|플랑드르]]의 인쇄소를 통하면 아무 문제 없이 구할 수 있었다는 소리. 어떻게 보면 괜히 불필요한 오명 하나만 추가한 꼴이 되었다.] * 1568년,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모리스코]] 무슬림 개종자들을 박해하며 [[알푸하라스 전쟁]]을 유발했다. 전시대엔 종교재판소로 가열차게 강제 개종, 감시하던 것도 부족해 아예 일상에서 무어인들의 모어인 아랍어나 아랍 의상을 착용하는 것도 금지해 실제로 어느정도 성과도 있었던 모리스코 개종 과정에서 오히려 대거 역효과를 내었다.[* 이렇게 터진 반란은 당연히 이 상황이 너무너무 즐거운 역사적 숙적 [[모로코]]와 그 뒤의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아 장장 3년에 걸쳐 동부 안달루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여기서 패배한 모리스코 유민들은 [[바르바리 해적|가까운 북아프리카 해적들에게]] 대규모 가담해 스페인 해안지대 현지 지리, 사정도 훤한 엄청난 전력이 됨으로서 스페인에 복수했다.] 펠리페 2세 이전 강제 개종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순응적으로 대응했던 모리스코인들은 결국 펠리페 2세의 통치를 기점으로 정부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결국 아들 시대 [[모리스코 추방]]이란 대규모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이 과정에서 인구 비중 상 모리스코인들의 현지 농민들 중 거의 30%, 반에 가까웠던 [[발렌시아]], 안달루시아 같은 지방들의 경제와 인구 구조는 박살난 건 당연. 모리스코 추방으로 큰 타격을 받은 스페인 내 세력은 교황을 2명 배출하고 발렌시아 쪽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대귀족 [[보르자 가문]]. 보르자 가문은 이전 시대인 [[페르난도 2세]] 때부터 왕가랑 맞먹는 파벌을 형성했고 실제 왕위 주장 움직임까지도 보였던 가문이였다. 대내외의 가톨릭식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한 행정 명령인 고로, 여전히 전통적인 스페인의 민족카톨릭 사관을 강하게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걸 '국민 통합'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 사람들 말곤 학계에서나 대중에서나 스페인 내외에서나 여전히 이걸 긍정적인 '업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유대인이나 무슬림 중에서 전문적인 뛰어난 인재가 많았기 때문에 아쉽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 1588년, 과거에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이겼던 그 무적함대를 잉글랜드의 분쟁으로 발생한 [[칼레 해전]]에서 태풍으로 인해 패하여 왕창 날려먹음. 동시기에 육상을 통한 네덜란드 원정 또한 실패. * 1589년, 숙적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의 [[리비아]]([[트리폴리]])와 [[튀니지]]([[튀니스]])에서 오스만 제국이 보낸 [[튀르크|튀르크족]] 관리들로부터 평소부터 멸시를 받아오던 토착민인 [[무어인]]들이 분노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무어인 반란의 주도자인 마라부(Marabout)[* 본명은 아니고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 [[수도자]]를 가리키는 말이다.]는 자신이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도움을 간절히 바랬다. 실제로 [[트리폴리]]와 [[튀니스]]에 침투한 유럽 국가들의 첩자들이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무어인 반란군들은 유럽인 첩자들한테 [[스페인인]]들이 볼모로 데리고 있는 옛 북아프리카 [[하프스 왕조]]의 [[왕자]]를 돌려보내고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해준다면, 투르크인들을 모조리 찢어죽이겠다고 할 만큼 반 오스만 감정이 강했다. 그러나 이때 펠리페 2세는 첩자들이 보내오는 보고를 다 받으면서도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반란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 일을 끝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북아프리카의 반란에 스페인이 군대를 보내 직접 개입하게 되면, 이 일이 오스만 제국을 자극하여 또 다시 막대한 돈을 들여 오스만 제국과 전면전을 벌일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한 때 북아프리카에서 뜨겁게 타올랐던 무어인들의 반란은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불과 1년 만에 허무하게 진압당해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이때 펠리페 2세가 군대를 보내 무어인들의 반란을 도왔다면, 북아프리카에서 순식간에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쫓아내고 스페인에 협조적인 이슬람 세력을 동맹국으로 만들 수 있었겠지만, 펠리페 2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그런 좋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https://blog.daum.net/dhs80116/1064|#]][* 다만 이건 상당히 결과론적인 관점이다. 불과 1년 전에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의 주력인 [[무적함대]]가 몽땅 날아간 상황에 펠리페 2세로서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 반란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싶어도 그 군대를 수송할 함대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당시 지중해 전선은 스페인 입장에선 지킬 것만 더럽게 많지 막상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아무 것도 없는 전역이었다. 특별한 자원도 없고, 토착 현지 세력도 신대륙 인디언들과는 비교도 못하게 정치 문화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기반이 강한데 안 그래도 사방팔방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스페인 입장에선 북아프리카-지중해는 레판토 해전 같이 카톨릭 세계의 수장이란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크게 걸려있을 때 빼곤 전혀 취해봐야 이득이 없는 지방이라 애초에 해당 지역으로 본격적인 확장을 할 생각 자체를 안했다.] * 후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사망. 뒤에 다루겠지만 나름대로 애를 엄청 쓰긴 썼다. 하지만 명색이 도덕을 중시하는 [[가톨릭]] 군주면서도 아들의 약혼녀를 [[NTR]]해버린 것만큼은, 실로 역사에 남을만한 오명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세계사적으로도 엄청나게 거대했던 [[스페인 제국]]을 시대적 한계 내에서 그나마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각종 담당 업무, 자치권이 보장된 지역에 따라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법치, 행정에서 중앙 집권과 효율적 통치 과정을 추구했다. 덕분에 당시 스페인 정부가 남긴 서류와 문건이 엄청나게 많고, 그 당시 스페인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세련된 관료제, 통치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이것만 보면 왜 이게 공이 아니라 과에 내려 왔는지 의문이 들 법 한데, 그 이유는 저런 거대한 정부 개혁 과정은 필연적으로 그 개혁 과정에서나마 국왕 일신의 권위와 지도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펠리페 2세는 그 특유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직접 나서서 미세한 과정 하나 하나까지]] 관료들을 통제하려고 드는 편집증 때문에 오히려 더 사무 처리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잦았다. 당장 네덜란드 전역이나 프랑스에서 정국이 엄청나게 긴박하게 돌아 가면서 시시각각 최고 결정자의 지시가 필요한데 막상 펠리페 본인은 한 동네 [[수도원]] [[수도자|수사]]들의 방 배정 문제나 건축 중인 엘 에스코리알의 정원사를 누구로 쓸까 같은 시시콜콜한 문제로 바빠 죽겠다며 죽치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 펠리페 휘하의 재상들은 '''국왕은 바쁘기는 더럽게 바쁘면서도 막상 중요한 일은 하나도 해결이 안 되는 시간 관리와 노동 효율이 최악이다'''라며 불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네 [[수도원]] [[수도자|수사]]들이 수도원에서의 방 배정으로 막 싸우다가 동시대 최대, 최강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스페인 국왕에게 직접 중재를 부탁한다니 웃기는 야사 같지만, 제프리 파커의 펠리페 2세 평전 2014년 개정판인 Imprudent King: A New Life of Philip II에 나오는 실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